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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양 조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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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천군 . . . . 10회 일치
         인구의 대다수가 1차 산업에 종사, 예천읍내 한정으로 상업, 공무원, 교원 종사자가 있다. 그 외에 [[제16전투비행단]]의 영향으로 [[군인]]도 제법 있다. 낙후한 [[군]] 지역이다 보니 상업지역이 빈약하기 때문에, 상당수 사람들은 문경, 안동, 영주 등으로 나가서 일을 해결한다. 풍양면, 용궁면 지역은 상주·문경권에 속해 있으며, 감천면 지역은 영주권에 속해있다. 나머지 지역은 대체로 안동 [[생활권]]에 속한다.
         예천은 북쪽은 백두대간(소백산맥), 남쪽은 낙동강 본류에 접하며, 군 가운데로 내성천이 굽이굽이 흐른다. 풍양면은 예천군에서 유일하게 낙동강 이남에 위치해있는 면이다. 큰 강인 낙동강이나 내성천 주변에는 정작 제대로된 평야가 없고[* 풍양의 낙동강 연안에는 평야가 좀 있고, 예천읍 고평에는 내성천 옆에 큰 들이 위치한다.], 내성천의 지류인 한천의 하류(예천읍 일원)에 비교적 너른 평야가 있다. 대략, 북쪽일원 (효자, 은풍)이 산악지형, 중앙(예천읍, 유천, 개포, 용궁, 호명)이 평지 혹은 구릉성 지형, 동부(감천, 보문)와 남부(지보)는 산지가 많은 지형이다. 용문은 중앙(예천읍)에서 북쪽(효자, 은풍)이나 서북쪽(문경 동로면)으로 가는 길 중간에 있는데, 중앙은 평지이고, 외곽이 산지인 전형적 분지 지형을 이룬다. 풍양은 예천군에서 유일하게 낙동강 이남에 위치한 면으로서, 북쪽과 남쪽은 산지이고, 중간이 평야이다.
         ||11||풍양초등학교|| 풍양면 낙상1길 50-10 ||
         ||3|| ||풍양중학교|| 풍양면 낙상1길 94 ||
         || '''풍양면''' ||<:>10.62%||<:>{{{#C9151E '''70.73%'''}}}||<:>{{{#696969 10.45%}}}||<:>4.38%||<:>2.00%||<:>{{{#808080 '''▼60.11'''}}}||<:> 77.97 ||
         || '''면 지역'''[* 용문면, 은풍면, 효자면, 감천면, 보문면, 호명면, 유천면, 용궁면, 개포면, 지보면, 풍양면] ||<:>13.16%||<:>{{{#C9151E 65.08%}}}||<:>13.23%||<:>4.45%||<:>2.29%||<:>{{{#808080 ▼51.92}}}||<:> 77.03 ||
  • 희빈 장씨 . . . . 6회 일치
         조사석의 도움으로 대왕대비전의 궁녀였던 장씨는 [[조선 인조|인조]]의 [[계비]]이자 [[조선 숙종|숙종]]의 증조모 뻘인 [[장렬왕후|자의대비]] 조씨를 웃전으로 모셨다. 장씨가 출궁되었을 때 [[장렬왕후|자의대비]]가 친필로 서신을 써서 법적 며느리이자 친정 외질녀인 [[숭선군]]의 부인 신씨에게 장씨를 돌보게 한 것이나 장씨의 재입궁을 주선했던 것, 조씨가 내전([[인현왕후]])과 소원하고 장씨를 치우치게 사랑했다는 기록<ref>숙종실록 12년(1686 병인 / 청 강희(康熙) 25년) 12월 10일(경신) 4번째기</ref> 의 존재 등으로 미루어 장씨가 [[장렬왕후|자의대비]]의 각별한 애정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1685년]] 대비 김씨의 3년상이 마쳐지자 [[자의대비|대왕대비]] 조씨는 [[조선 숙종|숙종]] 부부에게 과거 대비 김씨가 출궁시켰던 그녀의 궁녀 장씨를 재입궐시킬 것을 권고하였다고 하기도 하고, 그녀를 그리워하는 [[조선 숙종|숙종]]을 안타깝게 여긴 [[인현왕후]]가 숙종에게 간해 그녀의 재입궁을 주선했다고도 한다. 어쨌던 대비 김씨의 3년상이 [[1685년]] 12월 5일에 마쳐졌고, [[1686년]] 2월 27일에 후궁 간택령이 있었던만큼 장씨의 재입궁이 이 기간 사이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서인의 반응은 싸늘하여 [[자의대비|대왕대비 조씨]]의 상(喪) 중임을 앞세워 숙종의 득남에 축하연은커녕 하례인사조차 드리지 않았다. 또한, 다음 달인 11월 12일에는 숙종에게서 입궁하여 장씨의 산후조리를 도우라는 어명을 받고 입궁하는 장씨의 생모 윤씨를 지평 [[이익수]]가 명을 내려 사헌부 관원들이 그녀를 가마에서 강제로 끌어내리고 그녀의 하인들을 눈 앞에서 매를 때리고 체포하였다.
         다음날 23일은 [[인현왕후|중전]] 민씨의 생일이었는데 [[조선 숙종|숙종]]이 [[자의대비|대왕대비]] 조씨의 국상기간 등을 이유로 탄일 하례 의식을 생략하라는 어명을 내렸지만 국모의 당연한 권한이라는 이유로 어명이 무시되고 [[인현왕후|중전]] 민씨에게 하례가 올려졌다. 이에 [[조선 숙종|숙종]]이 분노하여 [[인현왕후|중전]] 민씨와 크게 다투고, 조정 대신들에게 [[인현왕후|중전]] 민씨를 '''교사스럽고 간특한 부인'''으로 칭하며 평소의 언동<ref group="주">시부모([[조선 현종|현종]]과 [[명성왕후]] 김씨)의 계시를 빙자하여 희빈 장씨가 아들을 낳을 수 없는 팔자라고 거짓을 고한 것, 원자가 탄생하자 노여워하며 주가(主家: 공주의 시가. [[홍치상]]의 어미 [[숙안공주]]를 의미)와 급격히 친밀해지고 [[홍치상]]의 무죄방면을 종용한 것, 궁인들의 당파를 나눠 핍박한 것, 폐출되는 [[귀인 김씨]]에게 동정심을 보이지 않고 가마를 타지 말고 걸어서 빨리 궁에서 나가라고 재촉한 것 등</ref> 을 비난하며 [[인현왕후|중전]] 민씨에게 국모로서 군림할 자격이 없으니 고사를 찾아보라는 명을 내렸다. 이는 민씨를 폐서인하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한 것이다. 이에 [[서인]] 대신 뿐만 아니라 [[남인]]조차 당황하여 [[권대운]] [[목래선]] [[김덕원]] [[민암]] 등은 [[인현왕후|중전]] 민씨에게 올려진 '''탄일 문안은 신자(臣子)들의 상례'''이니 [[인현왕후|중전]] 민씨에게는 죄가 없음을 주장하며 강력히 [[인현왕후|중전]] 민씨를 변호하였고, [[권대운]]은 고사를 찾으라는 [[조선 숙종|숙종]]의 명에 불복하며 사직을 청하였다. 이러한 조정 안팎의 반발에 대해 [[조선 숙종|숙종]]은 [[서인]]은 처벌하고 [[남인]]은 용서하는 차별을 보임과 동시에, 24일에는 [[인현왕후|중전]] 민씨가 [[조선 숙종|숙종]]과 크게 말다툼을 하면서 그녀 자신의 입으로 '진실로 나의 죄이다. 어찌할 것인가? 폐출시키려거든 폐출시키라.'는 과격한 언사들을 입에 담았던 사실을 폭로했다.
         [[인현왕후]]가 폐출된 후 [[조선 숙종|숙종]]은 새로이 계비를 간택하지 않고 원자의 생모인 희빈 장씨를 왕비로 삼을 것을 선포하였다. 5월 13일, 희빈 장씨의 왕비 명호가 정해졌다. 이는 후궁 소생의 원자가 왕비 소생의 정통성을 얻게 되는 사건임과 동시에 중인 출신이자 궁녀 출신인 후궁이 국모의 위에 오르는 조선 역사상 최초의 사건이었다. 하지만 [[장렬왕후|대왕대비]] 조씨의 복상 기간이 끝나지 않은 탓에 장씨가 정식으로 왕후로 책봉된 것은 다음 해인 1690년 10월 22일이다. [[조선 숙종|숙종]]은 장씨의 부모인 [[장형 (조선)|장형]](張炯)과 [[장형 (조선)|장형]]의 첫 아내 고씨는 옥산부원군(玉山府院君), 영주부부인(瀛洲府夫人)으로 추숭되었고, 장씨의 생모인 윤씨는 파산부부인(坡山府夫人)으로 책봉되었으며 [[장형 (조선)|장형]] 묘소에 옥산부원군 신도비를 세우도록 하여 장씨가 새로운 왕비가 되었음이 기정사실화 되었다.
  • 조긍하 . . . . 5회 일치
         '''조긍하'''(趙肯夏, [[1919년]] [[8월 16일]] ~ [[1982년]] [[1월 28일]])는 [[대한민국]]의 [[영화 감독|영화감독]]이다. 본관은 [[풍양 조씨|풍양]](豐壤)이며 [[아명|아명(兒名)]]은 '''조중하'''(趙重夏)이다.
         [[분류:대한민국의 영화 제작자]][[분류:대한민국의 영화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음악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작가]][[분류:1942년 데뷔]][[분류:투자가]][[분류:자유 연애]][[분류:대한민국의 연출가]][[분류:대한민국의 소설가]][[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분류:구니타치 음악대학 동문]][[분류:1919년 태어남]][[분류:1982년 죽음]][[분류:심장질환으로 죽은 사람]][[분류:풍양 조씨]]
  • 허목 . . . . 4회 일치
         당초 예조에서는 조대비의 복상을 1년으로 정했다. 하지만 [[송시열]], [[김수항]] 등 서인세력은 복상 기간을 1년이 아니라 9개월로 해야 한다며 벌떼같이 주장했다.<ref name="choyesong">[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2/04/2009020401279.html 효종대왕의 1년 복상은 그가 차남이었다는 뜻입니까?"] 조선일보 2009-02-05</ref> 이에 피곤해진 현종은 "경들 뜻대로 하라!"며 손을 털었다. 결국 대왕대비 조씨는 9개월 복을 입기로 했다. 하지만 남인 측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남인]]의 영수 허목은 제자들을 이끌고 궐문 앞에서 다시 상소를 올렸다.<ref name="choyesong"/>
         1675년 [[6월]]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옮겼다가 특별 승진하였다. 75년 말 [[윤휴]]가 대왕대비 조씨의 참최복을 주장하자 그는 [[허적]], 정지화(鄭知和), [[좌의정]] 권대운(權大運) 등에 맞서 [[윤휴]]의 의견에 찬성하였다. [[1676년]] 차자(箚子)를 올려 치병사(治兵事)·조병거(造兵車) 등 시폐(時弊)를 논하였다.
         * 조씨가숙(趙氏家塾) 편액
         <!--서인의 영수송시열과 남인의 형수 허목이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로 논쟁을 벌이게 되는데, 이것이 조선사에서 유명한 예송논쟁입니다. 자의대비는 조선의 제 16대 왕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조씨이며 한원부원군 조창원의 딸입니다. 1635년 인조의 정비 인렬왕후가 죽자, 3년 뒤인 1638년 15세의 어린 나이로 당시 44세였던 인조와 가례를 올리게 됩니다. 인조의 장남 소현세자가 1612년생, 차남 봉림대군이 1619년생, 3남인 인평대군이 1622년 생, 훗날의 효종비 인선왕후 장씨가 1618년 생이니, 세자 보다는 12살, 차남 보다는 5살, 며느리 보다는 6살 어린 어머니 였습니다. 1649년 제16대 왕 인조가 재위 26년 만에 죽자 대비가 되었고, 1659년 제 17대 왕 효종이 재위 10년 만에 죽자, 대왕대비가 됩니다. 이 해에 그녀가 입어야 할 상복이 정치 쟁점화 되었습니다. 조선 사회의 지배 이념인 성리학에 근거한 예론에서는 자식이 부모에 앞서 죽었을 때, 그 부모는 그 자식이 적장자인 경우는 3년상을, 그 이하 차자일 경우에는 1년상을 입도록 규정하고 있었고, 적장자의 배우자가 앞서 죽었을 경우에는 1년상복을 그 이하 차자의 배우자가 죽었을 경우에는 9개월 상복을 입도록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서인의 영수 송 시열은 인조의 장남인 소현세자의 상중에, 장남의 예로서 3년복을 이미 치뤘는바, 효종은 차남이므로 상복을 1년만 착복하면 된다는 기년설을 주장하였고 남인의 영수 허 목은 효종이 비록 차자이기는 하나 왕위를 계승한 헛은 장자의 권위를 계승한 것이기에 장자의 예를 따라 3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을 합니다. 즉 1차 예송은 예론상으로 종통문제를 변별하는 것이 핵심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 논쟁이 점 점 커지면서 서인들은 모두 기년설, 남인들은 모두 3년설을 주장할 뿐 아니라, 전국의 유생들도 서인과 남인의 색을 뚜렷이 하면서 조정이 더욱 시끄럽게 되자, 슬픔에 빠져 있던 효종의 아들인 제18대 왕 현종은 예송논쟁이 정치 쟁점화(현종 즉위초 서인과 남인의 정치 쟁점으로 인해 많은 유생들이 희생되었음.)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서인의 의견을 받아 들여 기년설을 채택하게 됩니다. 허목은 이 논쟁의 책임을 지고, 당시로는 모두 부임을 꺼려하는 척박한 고장, 삼척 부사로 옮겨가게 되나 2년 뒤 관직을 사퇴하고 향리 연천으로 돌아 갑니다. 결과적으로 당시 집권세력인 서인의 예론이 승리를 거두고 서인은 현종때도 계속 집권세력이 됩니다. 그러나 종법질서에 있어서 효종의 위상에 대한 논란은 결론을 보지 못 한 채 불씨를 안고 남아 있었는데, 이 불씨가 1674년 2차 갑인예송으로 살아 났습니다. 2차 예송논쟁은 효종의 비 인선 왕후가 죽자 자의대비(제 16대 왕 인조의 계비, 대왕대비)의 상복 입는 기간이 또 다시 문제가 된 것입니다. 집권세력인 서인은 효종의 비 인선왕후가 둘째 아들의 비 이므로 둘째 아들 비의 예에따라 상복을 9개월만 입으면 된다는 논리를 펴게 됩니다. 그러나, 남인은 다시 한 번 인선왕후가 왕통을 계승한 제 17대왕 효종의 비이기에 효종을 장자로 보고, 인선왕후를 장자 비의 예에 따라 1년동안 상복을 입어야 된다는 주장을 합니다. 현종은 이 예송논쟁을 다시 원점으로 돌려 재 검토를 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남인의 의견을 받아 들여 서인들을 조정에서 물리 칩니다. 즉 현종의 입장에서는 왕위를 계승한 아버지 효종이 적장자로서 대우를 받지 못한다면 효종 자신을 위시하여 앞으로 왕위를 계승하는 모든 사람들이 왕위 계승과 관련하여 적장자 대우를 받지 못 하는 것이 되기때문입니다 왕통에 문제점이 생길 수 있다고 판단을 한 것입니다.
  • 헌경왕후 . . . . 4회 일치
         |전임자 = [[효순왕후|현빈 조씨]](효순왕후)
         ****** 올케 : 조명건(趙明健)의 딸 임천 조씨(林川 趙氏)
         ****** 올케 : 조명건(趙明健)의 딸 임천 조씨(林川 趙氏)
         ***** 형님 : [[효순왕후|효순소황후]] 조씨(孝順昭皇后 趙氏, 1716~1751)
  • 홍승목 . . . . 4회 일치
         *** 딸 : 홍정식(洪貞植, ? ~ [[1945년 2월]]), [[풍양 조씨|풍양인]] [[조완구]](趙琬九, 1881 ~ 1952?)에게 출가
         *** 며느리 : 조씨(? ~ 1950), [[한국 전쟁]] 중 월북자의 가족이라 해서 사살되었다.<ref name="내일1" />
  • 김홍미 . . . . 3회 일치
         [[1557년]](명종 12년) [[경상도]] [[상주]]에서 태어났다.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을 지낸 김상직(金尙直)의 6대손으로, 증조부는 김예강(金禮康)이고, 할아버지는 장사랑 김윤검(金允儉)이며, 아버지는 옥과현감(玉果縣監) 김범(金範)이며, 어머니는 창녕조씨(昌寧曺氏)이다. 자는 창원(昌遠), 호는 성극당(省克堂), 성극(省克)이다.
         [[1589년]] [[이조]][[좌랑]](吏曹佐郞)으로 임명되었다. 그가 [[이조]][[좌랑]]으로 있을 때 누군가 그가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었다고 지목하여,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기축옥사]](己丑獄事) 때 파면되었다. 이후 [[상주]]에 내려가 몇년 간 집에서 칩거하였다. 그 뒤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나뉠 때에는 그는 [[남인]](南人)이 되었다. [[1589년]] 그에 대한 복권 여론이 나타나자 [[사헌부]]가 이를 지적하며 그가 이진길(李震吉)의 집에서 유숙한 일을 들었고, 왕이 이를 받아들였다. 그 뒤 복관되어 [[1592년]](선조 25년) [[4월]] [[임진왜란]]이 시작되자 그해 [[7월]] [[경상좌도]][[도사]]에 임명되고, 이듬해 어머니 창녕조씨의 상을 당해 사직하였다. 그러나 상중으로 내려간 뒤에도 선조는 [[정경세]]를 시켜 그와 그의 형의 안부를 묻고, 그의 학식이 어느 정도인가를 묻기도 했다.
         * 어머니 : 창녕조씨(昌寧曺氏)
  • 홍영식 . . . . 3회 일치
         [[1868년]](고종 5년) 그는 양주 조씨와 결혼하였으나 사별하고 후에 이씨와 재혼하였다. 1869년경부터 [[박규수]]의 문하생으로서 지도를 받으며 [[서재필]], [[김옥균]], [[김윤식]], [[박영효]], [[서광범]], [[유길준]], [[이동인]] 등과 서로 잘 알고 지냈다. [[박규수]]의 문하에서 [[청나라]]인 위원의 《해국도지 海國圖志》, [[청나라]] 사람 서계여의 《영환지략 瀛環志略》 등 중국의 개화서와 박지원의 《연암집》 등을 읽으면서 개화사상을 형성해나갔다. 또한 [[오경석]]의 문하에도 출입하며 글을 배웠다. 1876년 박규수가 죽은 뒤에는 유대치로 알려진 [[유홍기]] 등의 가르침을 받았다.
         청소년 무렵에 신문물을 접하면서 신학문에 열중하면서 부인 양주 조씨와의 관계는 다소 멀어졌고 보수적인 부친 [[홍순목]]과는 항상 상반된 의견으로 대립이 잦았다 한다. 그 중간에서 형 [[홍만식]]의 중재로 평온을 유지하였다.
         *** 부인 : 양주 조씨(? - [[1875년]])
  • 화완옹주 . . . . 3회 일치
         *** <sup>이복</sup> 올케 : [[효순왕후|효순소황후 조씨]] (孝純王后 趙氏)
         ** 서어머니 : [[귀인 조씨 (영조)|귀인 조씨]](貴人 趙氏, 1707 10 16~1780 10 05)
  • 나씨 . . . . 2회 일치
         * 나식(羅湜, 1498년 ~ 1546년) : 자는 정원(正源), 호는 장음정(長吟亭). 아버지는 창릉참봉(昌陵參奉) 세걸(世傑)이며, 어머니는 풍양조씨(豐壤趙氏)로 대사헌 익정(益貞)의 딸이다.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다. 1534년(중종 29) 사마시에 합격하여 선릉참봉(宣陵參奉)이 되었다가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 때 윤임(尹任)의 일파로서 이휘(李煇)의 사건에 연루되어 파직, 흥양(興陽)으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강계(江界)로 이배된 뒤 사사(賜死)되었는데, 그 때 나이가 49세였다. 1568년(선조 1) 영의정 이준경(李浚慶)의 상소로 신원(伸寃)되었다. 저서로는 『장음정집』 3권이 있다.
  • 외척 . . . . 2회 일치
         외척 세력으로 [[안동 김씨]][* 정확히는 '장동 김씨'로 재분류되는 한양 장동 일대에 거주하던 안동 김씨 일문으로, 실제 안동 등 영남에 거주하던 안동 김씨는 권력에서 소외되어 있었으며, 당색에 있어서도 장동 김씨는 노론 계열이었던 데 비해 안동 김씨는 남인 색채가 짙었다.], [[풍양 조씨]], [[여흥 민씨]] 등이 유명하다.
  • 이경희 (1880년) . . . . 2회 일치
         [[대종교]] 신자들의 독립운동 참여로 신자들은 조선총독부의 감시를 당했으나 그는 개종을 거부하였다. [[1939년]]부터 [[창씨개명]]령이 나오고 [[1940년]]부터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 그러나 이경희는 끝내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1942년]] 여름 [[경성부]] [[돈암동]]을 떠나 대구로 내려가 야산에 숨어 밭을 갈고 농부로 생활하였으며, [[항일 단파 방송]]인 [[미국의 소리]] 방송을 비밀리에 밀청하고 해방을 예상하였다. 이때 그 몰래 그의 부인 조씨가 [[청도군]]에서 교사 생활을 하는 둘째 사위에게 [[보리쌀]]을 얻어 생계를 유지하였다.
         * 부인 : 조씨([[1896년]] ~ ?)
  • 정성왕후 . . . . 2회 일치
         |후임자 = [[효순왕후|현빈 조씨]](효순왕후)
         **** 며느리 : [[효순왕후|효순소황후]] 조씨(孝順昭皇后 趙氏, 1715~1751)
  • 조원진 . . . . 2회 일치
         || '''본관''' ||[[조씨|배천 조씨]]||
  • 조진호 (축구인) . . . . 2회 일치
         '''조진호'''(趙眞浩, [[1973년]] [[8월 2일]] ~ [[2017년]] [[10월 10일]])는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였으며, [[대전 시티즌]], [[상주 상무]], [[부산 아이파크]]의 감독을 지냈다. 본관은 [[함안 조씨|함안]].
         [[분류:1973년 태어남]][[분류:2017년 죽음]][[분류:함안 조씨]][[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대륜고등학교 동문]][[분류:한양대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축구 선수]][[분류:포항 스틸러스의 축구 선수]][[분류:상무 축구단 (실업)의 축구 선수]][[분류:제주 유나이티드 FC의 축구 선수]][[분류:성남 FC의 축구 선수]][[분류:K리그1의 축구 선수]][[분류:제주 유나이티드 FC의 축구 감독]][[분류:대전 시티즌의 축구 감독]][[분류:상주 상무 축구단의 축구 감독]][[분류:부산 아이파크의 축구 감독]][[분류:1992년 하계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분류:1994년 FIFA 월드컵 참가 선수]][[분류:1994년 아시안 게임 축구 참가 선수]][[분류:대한민국의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분류:대한민국의 아시안 게임 축구 참가 선수]][[분류:대한민국 U-20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분류: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분류: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분류:대전 시티즌의 코칭스태프]][[분류:K리그1의 축구 감독]][[분류:전남 드래곤즈의 코칭스태프]][[분류:부산 아이파크의 코칭스태프]][[분류:상주 상무 축구단의 코칭스태프]][[분류:심장 마비로 죽은 사람]][[분류:제주 유나이티드 FC의 코칭스태프]]
  • 한규복 (1881년) . . . . 2회 일치
         묘소는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서초동([[1973년]] [[서울시]] 영동출장소로 편입되었다가 현 [[서초구]]로 편입)에 부인 평양조씨 조인옥, 김해김씨 김학인과 합장되었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 중 중추원, 도지사, 도 참여관 부문,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관료, 중추원, 친일단체 부문에 각각 선정되었다. [[2009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 부인 : 평양 조씨, 조인옥(平壤趙氏 趙仁玉, [[1881년]] [[2월 24일]] - [[1945년]] [[9월 10일]]). 조재연(趙載淵)의 딸
  • 한창수 . . . . 2회 일치
         ***** 자부 : 풍양 조씨
  • 효령대군 . . . . 2회 일치
         *** 자부 : 군부인 백천 조씨
         *** 자부 : 군부인 한양 조씨
  • 흥친왕 . . . . 2회 일치
         이는 [[조선 철종|철종]] 사망 당시 12세의 미성년자였던 [[대한제국 고종|이명복]]([[흥선대원군]]의 차남)이 성인인 흥친왕보다 조종하기 쉬울 것이라는 [[흥선대원군]]의 계략과 [[신정왕후 조씨|조대비]]의 묵인이 작용한 결과였다. 또한 [[흥선대원군]]은 [[안동 김씨]]의 일부를 포섭할 때, [[김병학]](金炳鶴)의 딸, 혹은 [[김병문 (조선후기)|김병문]]의 딸 중에서 둘째 아들인 [[대한제국 고종|명복]]의 배필로 맞이하기로 약속한 바 있다. 이것 역시 재면 보다는 명복을 선택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한때 그는 아버지 흥선대원군에 의해 큰아버지 [[흥완군]] 이정응의 양자로 보내지는 것이 고려되기도 했다. 그의 흥완군 양자 지정 논란은 [[1864년]] 고종에 의해 취소되어 최종 종결되었다.
         [[1863년]] [[12월]] 동생 [[대한제국 고종|재황]]이 후사없이 죽은 [[조선 철종|철종]]의 뒤를 이어 [[조선]] 왕으로 즉위했다. 그는 바로 승후관부사용(承候官付司勇)에 제수되었다. [[1864년]](고종 1년) [[5월]] [[문과]]에 급제하여 그날로 규장각 대교(待敎)에 임명되었고, 여러 고위 관직을 거쳤다. 그해 [[8월]] 아버지 흥선대원군은 다시 그를 아들 없이 죽은 형 [[흥완군]]의 양자로 보냈다. 그러나 대왕대비 조씨의 특명으로 다른 종친의 자제를 [[흥완군]]의 양자로 하도록 하고, 이재면의 양자 입양은 취소되었다.
  • 곽월 . . . . 1회 일치
         ***** 자부 : [[함안 조씨]](咸安趙氏)
  • 반효정 . . . . 1회 일치
         * 2013년 《[[삼생이]]》 - 조씨
  • 윤휘 . . . . 1회 일치
         *** 숙모 : 조씨, 조안국(趙安國)의 딸
  • 이소선 . . . . 1회 일치
         * 1933년 경 아버지 이성조씨, 항일독립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학살됨.
  • 전정희 (배우) . . . . 1회 일치
         1996 자랑스러운 시민상-미풍양속부문(조 순 시장상)
  • 정환덕 . . . . 1회 일치
         [[1905년]](광무 9) 음9월 20일 대흥군수(大興郡守)에 제수되었다가 음12월 1일 면직하였다. 이해 음12월 29일 양주(楊州) 풍양(豐壤)의 비각을 증건하고 비석을 수립한 공로로 가자되었다.
  • 조길형(1962) . . . . 1회 일치
         [[대한민국]]의 [[경찰공무원]] 출신 [[정치인]]으로, 현 [[충청북도]] 충주[[시장(공무원)|시장]]([[자유한국당]])이다. 본관은 [[함안 조씨|함안]].
  • 조재윤 (체조선수) . . . . 1회 일치
         [[분류:평양 조씨]]
  • 조청희 . . . . 1회 일치
         [[분류:1961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KBO 리그 투수]][[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분류:대구초등학교 (대구) 동문]][[분류:경운중학교 (대구) 동문]][[분류:충암고등학교 동문]][[분류:건국대학교 동문]][[분류:조씨]]
  • 조해현 . . . . 1회 일치
         [[분류:1960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창녕 조씨]][[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분류: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동문]]
  • 조현근 . . . . 1회 일치
         [[분류:대구본리초등학교 동문]][[분류:평양 조씨]][[분류:두산 베어스 선수]][[분류:삼성 라이온즈 선수]][[분류:경찰 야구단 선수]]
  • 조환길 . . . . 1회 일치
         [[분류:1954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천주교 대구대교구장]][[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 대주교]][[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대구고등학교 동문]][[분류:광주가톨릭대학교 동문]][[분류:창녕 조씨]]
  • 청릉군 . . . . 1회 일치
          | 어머니 = [[군부인]] [[장흥 조씨]](양모)
  • 한병주 . . . . 1회 일치
          | 배우자 = [[한양 조씨]]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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